3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19 터널을 겨우 벗는가 싶더니 이번엔 엠폭스가 경각심을 키우고 있다. 보건당국은 지난 13일 0시를 기해 엠폭스 감염병 위기경보 수준을 ‘관심’에서 ‘주의’ 단계로 올렸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 언어세력권에서 우리말의 위치를 알려주는, 우리말의 한계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통화(通貨)에 달러라는 기축통화가 있듯이, 언어에도 ‘기축언어’가 있다. 영어 같은 게 그런 역할을 한다. 우리말에 넘쳐나는 영어의 ‘파편’들 역시 그 부산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MPOX’가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말(부상어·浮上語)이 됐을 때 한국에선 이를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우리 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로 ‘엠폭스’라고 전달한다. 그것은 언론에서 기사를 작성할 때 외래말을 처리하는 오랜 관행이기도 하고, 우리말을 모국어로 쓰는 화자로서 당위적 문제이기도 하다.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에 의해 법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런 군더더기성 표기는 언론 보도를 유심히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유니세프(UNICEF·국제연합아동기금) 피파(FIFA·국제축구연맹)…. 이런 유형의 표기 중 고전적인 형태가 ‘유엔(UN·국제연합)’일 것이다. 이 말도 처음엔 3중 표기의 과정을 거쳤다. 지금은 ‘유엔’으로 수렴돼 가는 중이다. ‘UN’은 우리 문자가 아니라서, ‘국제연합’은 글자가 길어져서 언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지금은 ‘유엔’ 자체가 널리 알려져 한글만 써도 소통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자유시장’에서 말·글 간 세력다툼을 통해 걸러진 결과다. ‘에이즈’와 ‘유니세프’도 이 범주에 넣을 만하다. 하지만 ‘나토’ ‘아세안’ ‘피파’ 등은 아직 그 단계까진 가지 못한 느낌이다. 한글 표기 단독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영문자나 한글 번역어를 병기할 때 의미 완성도가 훨씬 높아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말 안에서 이들 외래어가 자리잡은 과정에 비해 ‘엠폭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했다. 용어 탄생에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덧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엠폭스의 원래 명칭은 ‘Monkeypox’이고, ‘MPOX’는 그 약칭이었다. 이를 우리말로 옮긴 게 각각 ‘원숭이두창’ ‘엠폭스’다. 2022년 11월 세계보건기구(WHO)는 Monkey에서 연상되는 특정 지역 차별과 낙인효과를 막기 위해 정식 명칭을 ‘MPOX’로 바꿨다. 이에 따라 우리 질병관리청에서도 그해 12월 원숭이두창 대신 ‘엠폭스’를 한글 질병명으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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